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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편은 "언제까지"라는 절망적인 물음으로 시작하여 기쁨과 확신에 찬 찬양의 말로 끝맺는다. 시인의 불평은 하느님º자신º원수의 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신학적 측면 곧 하느님과의 관계(2절)에서, 또한 사회적 측면 곧 이웃과의 관계(3절)에서 이해한다. 그에게 건강과 행복은 하느님이 함께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시인은 고통 가운데 하느님의 정의에 대하여 탄원하고 있다.(2-3절) 그런데 고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 시편을 기도로 바치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의 상황에 맞춰 기도를 바칠수 있도록 해준다. 이 시편은 마지막 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어 구원의 기쁨을 노래한다. 그의 구원은 주님의 자애에 근거하고 있다. 시인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죽음에 임박했으나 하느님의 변치 않는 자애에 의지하여 기도한 결과 구원을 노래하게 된다.
"언제까지"라는 히브리말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한 구슬픈 탄식을 나타낸다. 2-3절에서 " 언제까지"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 반복은 장기간의 고통과 시인의 곤경 상태를 강조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주님이 행동하시길 재촉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신뢰가 없어서 그렇다고하지만 오히려 그가 하느님을 믿기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다. 시인은 극도의 당혹감과 낙심을 표현하고 있다.
"언제까지··· 잊고, 얼굴을 ··· 감추시렵니까?라는 표현은 전형적으로 하느님의 부재를 말한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서 시인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으신다. 이 표현을 통해 육체적 질병보다 더 괴로운 정신적 소외감이 강조된다. 하느님은 시인을 잊으시고 시인에게서 숨어 계시어 그를 외면하는 듯하다. "잊고 계시렵니까?"는 하느님의 버리심을 표현한다. 주님은 이집트 탈출에서 계시하듯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을 잊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잊으심은 일시적일지라도 심각한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불멸의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 '얼굴을 감추시는 것'은 하느님의 분노나 심판을 가리킨다.
시인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고통과 번민에 시달린다. 항구를 떠난 선원이 사방을 헤매듯이, 그리고 빛을 빼앗긴 사람이 많은것들과 충돌하듯이, 하느님의 잊으심을 직면한 사람도 끊임없이 걱정과 근심과 슬픔에 사로잡힌다.(크릿소스토무스)
시인은 자기 영혼의 쓰라림과 마음의 번민뿐 아니라 원수가 괴롭히는 상황에서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이야기한다. "원수"는 구체적 인물이거나 시인의 고통 자체를 의인화한 것일 수 있다. 원수는 시인의 고통이 하느님의 벌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인이 고통을 겪고 원수가 의기양양해하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이 시인을 잊으신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3개의 명령법("살펴보소서", "대답하소서","비추소서")으로 하느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통해 주님이 어둠을 몰아낸다고 한다. "살펴보소서","대답하소서"라는 말은 얼굴을 다시 돌려달라는 표현이다. 자신이 주님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받을수 있도록 얼굴을 돌려달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잠'은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사용되는 은유다. 시인에게 죽음은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죽음의 실제적인 고통이다. 시인은 "제 눈을 비추소서"라고 하는데'눈의 빛'은 생명을 의미한다. 눈이 머는 것은죽음을 앞둔 생애의 온갖 힘이 다 빠져나간 상태다, 구원을 뜻한다. "눈을 비추소서"는 영적으로 마음의 소경 상태를 고쳐달라는 간구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는 여기서 마음으 눈을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눈이 죄 때문에 감기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다.
" 제 원수"와 "저의 적들"이 대구를 이룬다. 여기서 단수로 된 "원수"는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며, 복수로 된 "적들"은 시인의 일반적인 적들을 말한다. 시인이 '흔들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것이다.시인이 흔들릴 때 적들은 날뛴다."우리가 죄를 지음에 따라, 적들은 우리에게 거만하고 오만하게 군다. 그리고 우리는 죄에 짓눌린다. 이것은 실제로 영혼을 떨어뜨리고 억압하기 위한 죄의 본질이다" 시인은 죽음뿐 아니라 악인들이 날뛰는 것에서 구원되기를 기도한다.
시인은 혼란 속에서도 주님의 자애 때문에 든든히 서있다. 그는 과거에 하느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크게 체험했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주님의 구원을 미리 기뻐한다.시인은 그분의 의로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 의존한다. '의지하다'는 든든하게 서있는 모습으로 5절의 '흔들림'과 대조를 이룬다. '의인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안에 굳건히 있을 때 그(녀)는 그것에 대해 칭찬을 요구하지 말아야한다. 자만 자체는,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동안, 그런 사람들을 제멋대로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시인은 탄식에만 머물지 않고 신뢰와 희망을 되찾는다. 그는 주님의 승리를 노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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