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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메이어스는 가장 적당하게 익은 금언 몇 가지를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오는 간단한 지침을 따름으로써 균형 있는 관상수련법을 확립, 유지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고 관상생활에 더 깊이 접근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 그대의 암자가 가르쳐 주리라

 

인간의 고유함은 축복이고 짐이고 기쁨의 근원이며 고뇌의 원천이다. 이는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한 뒤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 '그대의 암자에 들어앉아 있으라' 는 말은 사방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정된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라는 말이다.

암자는 자신을 뜻하기도 하다. 그대의 자신에 들어앉으라.  그대가 암자에 몇 해 동안 머무르면 암자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듯이 그대 자신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 속에서 나 자신을 생각하고 나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는 방식과 내가 처신하는 방식 사이에서 불일치하는 충돌을 느끼게 된다.

 

■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답변을 거부한다. 왜냐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질문 대상이지 질문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면서 뭔가 빠져 있는 틈새를 방치한다. 나는 좋아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 습관적 반응들로 뭉쳐진 것들 이상이며 자신을 관찰하고 주장하는  모든 것, 어떤 것에 대한 불투명한 의식 그 이상이다.

수호자 자아는 기분, 체험, 행동, 사물에 '나'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인명표를 기재해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종의 대본 작가다.

수호자 자아는 어린아이가 어른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감당할 수 없듯이 더 이상 초월적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말라는 충고는 수호자 자아의 핵심을 파고든다. 누군가를 다르다고 낙인찍으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와 같이 반대 개념으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기 쉽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판단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이런 습관들에 익숙에 있다. 복음서에 심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 한 처음에 

 

아빌라의 성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제자였던 마세오 수사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도할 때면 비둘기가 구루룩거리듯 부드러운 소리로 '구루루로 구루루로' 하며 기쁨을 표현하기 일쑤였다. 그는 얼굴 가득 기쁨을 담고 즐거운 마음으로 관상에 임하고 했다.

어떤 낱말을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수련법이 지니는 단순성에 있다. 마세오 수사는 도움이 되는 이 기법을 우연히 발견했을 것이다. 그가 활용한 '구루루로 구루루로' 하는 소리는 지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수련에 혼란을 주는 관념적 심상이나 생각을 유발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관상수련에 필요한 자세는 다양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시험을 통해 자신에게 알맞은 자세를 찾아야 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 몸에 익숙해져야 자신의 자세가 정립된다. 이런 자세는 마음을 맑게하고 혼란 속에 있는 마음을 해소시켜주고 방황하지 않게 마음을 잡아준다.

 

■ 이탈

 

우리가 이탈 즉, 벗어남을 실천하게 되면 깊이 가라앉아 있던 여러가지 다양한 비축물들이 외부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를 마음 편하게 날조한 거짓들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한 거짓, 허구가 주는 혼란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거기에서 오는 고통이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 머지않아 억압된 모든 충동들이 나타나면서 거짓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아픔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허구를 지탱하고 또 그로 인해 발생한 긴장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 깨어있어라

 

여러분 그 분은 오늘 당장 아니 내일 언제 오 실질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시는 날 맞이 할 수 있도록 준비 없이 허둥대다가 그냥 보내면 안 되니까요.

 

'이게 대체 무슨 꼴들인가?

하느님께서 그대들을 용서하시기를!'

그는 기도를 바친 다음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그 형제의 손을 잡고 타일렀다.

'형제여, 조심하게나.'

 

-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지난 아쉬움을 보내고 건강하시고 희망찬 한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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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기쁜소식, 하느님이 어리석고  우둔한 우리를 위해 축복과 은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손수 뽑으시고  세상에 널리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1. 복음서는  언제 만들어 졌나요

복음-기쁜소식,  예수님과  같이  활동하던 목격  증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예수님에 대해 전해지는 기록을 남길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엮음으로서 복음서가  만들어졌다. 제일 언저 마르코복음서는  기원후 60년대 후반쯤에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은 70~80년경에 루카복음서와 요한복음 순으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2.  공관복음서

마태오복음서, 루카복음서,  마르코복음은  전체적인  구성과 자료 배치 순서도 많이 겹쳐서 서로 비교할 수  있으므로 공관복음서라고 말한다.

 

3. 예수님의 족보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 에서부터 다윗을  거쳐  요셉까지 이르는  족보를  전해 줍니다.

 

4.  예수님에 대한 호칭

복음서에서는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자주 나오는데 스승님,주님이 맞다.

 

5.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다섯가지 설교를 말하고 있다.

산상설교 (하늘 나라의 시작)

파견설교 (하늘 나라의 선포)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 (하늘 나라의 신비)

교회론적  설교 (하늘  나라의 맏물인 교회)

종말론적설교 (하늘 나라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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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성경의 이해 두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1. 창세기( 기원의 책)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 창조 사업이 나옵니다. 

제1일 : 빛과 어둠을 분류(즉 낮과 밤의 분류)-날의 개념이 생김, 해와 달과 별들.

제2일 : 하늘과 땅을 분리, 창공 아랫물과 윗물 분리.

제3일 : 물은 한곳으로 흙도 한곳으로 바다와 육지의 분류함.(땅을 채우고, 온갖 동물들 집짐승, 들짐승 등등)

1장 3절-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생략) "하루" 가 생김

 

1장 6절- 물 한가운데 창공이.......(생략) 물과 물을 갈라 놓아라 궁창 위의 물 궁창 아랫물 .....(생략) (하늘과 땅 생김)

 

1장 9절- 하늘 아래있는 물은 한곳으로.....(생략)그리하여 땅이 드러나게....(생략)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바다, 육지)

 

1장 14절- 하늘의 궁창에는 빛 물체들이 생겨.... 땅을 비추는 빛물체.....(생략) 큰 발광체 - (해 낮을 다스리고)

   작은 발광체.....(생략) (달은 밤을 다스려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장 20절-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창공을 날아....(생략)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장 24절-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들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땅장식하심)

 

1장 26절-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생략)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1장 28절-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1장 31절- 하느님께서 손수 만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2장 2절-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엔 쉬셨다.

 

2장 3절-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 제정)

 

1장에서 인간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 있는데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진흙을 빚어 사람 만드시고 그 코에 하느님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다. (흙=육체) 따라서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  흙(아담)이란 하찮은 것, 부서지기 쉬운것, 옹기장이 손에 달린 문제.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맘에 드는 삶을 살아가도록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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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성경이야기 첫번째 시간입니다. 

아래 글은 가톨릭 성경을 기반으로 사실에 근거하여 내용에 충실을 기하고자 했습니다. 내용이 미숙하더라도 넓은 맘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한다.

① 구약성경 :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약속이다.

② 신약성경 : 하느님과 새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인과 맺은 계약이다.

 

성경의 언어

① 히브리서 : 구약성경의 원전을 마쏘라 본문이라 한다. 구약성경의 아라메이어(히브리어의 지방어)로 기록되어 있다.

② BC 3세기의 희랍시대에 히브리어 성경은 희랍어성경으로 번역되었다. 이 희랍어 성경을 70인역이라고 한다.

③ 라틴어 성경은 불가타역이라고 한다.

④ 성경은 모두 73권으로 되어 있고 구약성경이 46권(히브리어)이고 신약성경이 27권(희랍어)으로 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형성은 여러 계로 나눌수 있다.

1) 모세 5경(토라 율법서)의 형성

① 야훼계 전승, 즉 J 또는 Y전승이라고 한다. BC 10세기에 시작해서 400년에 완성되었다고 본다. BC 950년 솔로몬왕의 혼합주의적인 정책으로 말미암아 모세전승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때 형성됨.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른다.

 

② 엘로힘계 전승, 즉 E 전승이라고 한다. BC 850년 솔로몬의 정치적 몰락과 우상숭배로 인한 실망때문에 왕 전체를 배척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 한다.

 

③ 신명기계 전승, 즉 D전승이라고 한다. BC 650년 북왕국의 몰락을 보면서 유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설교체이다

 

④ 제관계 전승, 즉 P전승이라고 한다. BC 550년 바빌론 유배중 제관들은 유배의 원인을 깊이 숙고한 끝에 야훼 종교를 다시 수인위해 기록되어짐. 이스라엘 민족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날개의 단위로 전체적이던 것이 하나의 전승으로 엮어진 것이다.

 

※ 성경이란?

 

1.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편지. 그리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2.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눌린자를 일으키고 묶인자를 풀어주고 갇힌자를 해방시켜주기 위함이다' ( 이사야 예언서 )

3. 성경의 위력은 새 마음, 새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둔한자 깨닫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고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알아낸다. (히브리서 4)

4. 성경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이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경이야기는 다음 시간에도 쭉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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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떤 일을 근본적으로 구명하는 사람이다. 그는 근원에서 출발한다. 이는 그가 뿌리, 곧 복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권고하는 영적 독서와 진지한 성경 고찰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과 연설에서 드러나듯이, 그에게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한 권의 책 혹은 사복음서를 뜻하지 않는다. '복음'은 원래 문서나 책이 아니라 소식, 더 자세히는 기쁜 소식과 해방하는 소식을 전한다는 뜻한다. 그 소식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며,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하고 또 그에게 결단을 내리라고 호소한다. 구약성경에서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곧 해방되리라는 소식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식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분의 죽음과 부활, 설령을 통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고 현존하시는, 높이 들어 오려지신 주님, 그분께서 맨 마지막에 올 것이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고 또 선사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소식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요 관심사는 교회 안에서 생생하게 선포되고 우리가 믿고 찬미하며 삶 속에서 실천하는 하느님의 복음이다. 그에게 복음은 다름이 아니라 기쁨의 복음이다. 이 기쁨은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존재 안에서 모두이신 하느님만이 선사하실 수 있는 충만한 삶을 의미한다. 교황 권고'복음의 기쁨' 첫 장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드러난다. 복음의 기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불의의 극복이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그다음 장에 언급된다. 그는 더 깊은 곳에 손을 댄다. 그는 기쁨과 열정이 없는 상태, 자신에게만 갇혀 있는 인간과 그의 비뚤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내적 공허와 외로움을 문제로 삼는다. 자기 자신에게만 향해 있는 비뚤어진 마음은 아우구스티누스뿐 아니라 마르틴 루터 역시 알고 있던 모티브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언급한 자기중심적 태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더 정확하게, 기쁨과 열정이 없는 상태는 초세기 사막 교부들부터 토마스 우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근본 죄이자 근본적 유혹인 나태에 연원한다. 나태는 아래로 잡아끄는 힘, 둔감함, 영적인 일에 싫증을 내는 태도로서 현세적 슬픔을 야기하는 마음 상태다.
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복음서는 모든 회의 때마다 공의회 교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였다. 이는 복음이 의장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공의회는 선포되고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을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새로이 되돌려 놓았다. 바오로 6세는 교황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화야말로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이라고 했으며, 교회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많은 강론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계획을 전개시켰다. 이 강론들은 그의 선교 회칙인'교회의 선교 사명'에 집약되어 있다. 베네딕도 16세는 그의 교서'믿음의 문'에서 그리고 2012년에 열린 주교시노드에서 이 관심사를 채택했다. 이 시노드가 거둔 열매는 '복음의 기쁨'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복음화는 다름 아닌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직에서 교회의 핵심적 사목 계획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 을 근본 핵심이라고 부른다. 이 통찰로부터 그는 선포를 위한 실제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다. 복음을 선포할 때 교리를 부수적인 측면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들을 오직 본질적 맥락에서 바라볼 때만 그 근원적 아름다움과 온전한 매력이 새롭게 빛날 것이다. 그럴 때만 복음으 향기가 새롭게 퍼져 나갈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과 도덕의 혁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도덕을 복음에서부터 해석하려 한다. 그는 이를 복음의 선포성에 상응하여 추상적이고 교훈적인 언어로가 아니라 단순한 언어, 그렇다고 단순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언어, 소통과 대화를 중시하는 언어로 해석한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그들과 동행하는 언어다. 이로써 그는 교리 가운데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이 늘 새롭고 또 새롭게하는 원천이라는 사실 그리고 결코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진리임을 보여 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에게 믿음의 아름다움을 확신시키고 그들이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삶을 살라고 용기를 북동아 주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성과 신학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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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문학은 위기의 문학이다. 묵시문학 작품들은 위기로 느껴지던 시절, 박해와 억압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줌으로써 희망을 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기는 때로 정치적, 군사적 억압이나 신학적 위기였고 때로는 특정 집단이 기존 사회에서 잘려나갈때 느끼는 고립감과 소외감이기도 했다. 몇몇 묵시록은 그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정확히 알아낼 수 없으나 많은 경우 묵시문학 작품은 특정 위기에 대한 반응과 응답으로 보인다. 실제로 위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묵시록 저자의 눈에는 위기가 존재했을 것이다. 저자는 실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근거해서 작품을 썼기에 위기가 실재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령 요한 묵시록의 연구자들은 1세기 후반부에 로마제국이 교회를 박해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였다. 사실 당신에 공식적인 대박해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요한 묵시록 저자는 박해와 순교, 그리고 항구한 신앙고백에 큰 관심을 보인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큰박해가 있었는가를 따질 것이아니라 저자가 그렇게 생각했느냐를 밝혀야 한다. 파트모스의 요한은 몇몇 작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근거로 제국의 박해가 현실로 느껴졌을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당면한 상황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했을 것이다, 곧,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사탄과 그 세력이 지배하고 사탄의 대표격인 로마제국이 모든 힘을 쥐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사탄과 로마제국을 패배시키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새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몫을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묵시록은 현실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희망과 위로를 전달한다. 묵시록을 접한 사람들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승리를 거두시리라 확신하면서 현 상황을 견딜 힘을 얻는다. 현재의 사회, 정치적 상황은 일시적인 것이기에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변화를 일으키시어 의로운 이들이 보상을 받는 다른 세상을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묵시문학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 기능도 수행한다. 사회, 정치, 군사, 신학적 반대 세력에 맞서는 이른바 저항 문학이다. 하느님께서 미리 모든 것을 결정해 두셨고 하느님께서 역사를 완성시키시리라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기에 무력과 폭력을 통한 혁명적 저항은 피한다. 지배세력의 가치관과 권위에 도전하여 순교로 맞서기도 하고 묵시록을 통해 하느님이야말로 우주와 역사를 지배하는 진정한 힘과 권위임을 보여 주면서 지배 세력과는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시한다. 또한 묵시록은 다른 세상 혹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줌으로써 독재와 불의한 체제와 부적절한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항하라고 촉구한다. 묵시문학적 사상은 때때로 다가올 세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현 세상의 문제와 병폐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후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삶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세상을 염원하기에 현 상황을 무조건 받아들이게 만드는 진정제가 아니라 저항과 도전을 자극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기존의 질서에 위험요소가 되기도 한다. 묵시록 저자들은 악과 폭력, 억압과 불의의 세상에 맞서 소리를 높인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 평화와 정의의 세상에 맞서 소리를 높인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 평화와 정의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 묵시문학은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진정한 군위이신 하느님께 눈을 돌리게 한다. 묵시문학이 염원하는 새로운 세상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이며, 새로운 창조가 실현되는 곳이다. 역사는 하느님 손에 달렸으며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정치 사회적 변혁을 도모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묵시문학 작품들은 여전히 저항문학으로서 현재의 사회, 역사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촉구하기도 한다는 말은, 미래만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사회,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묵시문학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묵시문학은 위로를 주기도 하고 도전을 요구함으로써 제 역할을 다한다. 이를테면 다니엘서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티나으 유다인들을 박해했던 기원전 2세기에 그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아브라함의 유언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도전하였다. 인류 공동의 적인 죽음에 직면한 독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쿰란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당시의 대사제와 성전 예배를 반대했던 유다교 분파에게 팔레스티나으 종교, 사회적 질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였다. 요한 묵시록은 로마제국이라는 짐승에 맞서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으 제공함으로써 신앙인들이 새로운 현실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고 싸워나갈 의미를 선사하였다. 베드로 묵시록과 바오로 묵시록은 정경에 포함되즌 않았지만, 거기 등장하는 모티프, 이미지, 개념과 사상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와 연극에서 사용된다. 묵시사상은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각종 자연 대재해, 전쟁과 폭력, 물질만능과 허무주의, 우울증 등으로 종말을 예감하거나 종말을 체감하는 많은 사람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할 것인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 영감을 준다. 그리고 용기 내어 새로운 세상을 위해 도전하도록 힘을 불어 넣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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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덟 가지 행복'  (0) 2022.02.10
시편 23편  (1) 2022.02.08
시편13편  (0)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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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행복론을 영성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행복론이다. 산상 교훈의 장소는 아마도 가파트나움 근처 게네사르 근처 게네사르 평원의 언덕일 것으로 추정된다.

 

1.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 마태 5장 3절 ) - 이 행복은 모든 행복의 바탕이 된다. 가난은 물리적으로 궁핍함을 말하며 가끔 부유한 자들의 희생물이 된다. 이들을 도와줄 이는 하느님뿐이라고 예언자들은 단언한다. 특히 시편에서는 가난이라는 개념을 영성화하여 자기의 부족을 느끼면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자를 행복한 가난한 자로 인식했다. 이 뱅복한 가난한 자는 사람이나 물질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기대는 사람이다. 후기 예언자 참으로 아나임'('anaim)을 구제하는 하느님의 손길은 예수라는 구세주이고, 가난에 시달리는 인류는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사상으로 전환했다.  신약성서에서 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 전해져서 하느님은 그들이 지금까지 가난했던 이유를 밝히고 그들을 메시아의 왕국으로 불러들이신다.

 

2. 슬퍼하는 사람이다. ( 마태 5장 4절 ) - 첫째 행복의 대목은 이사야서 61장 1절을 반영했고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대목은 61장 2절을 반영한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61장 2절은 이야기하는 메신저의 직능 중의 하나이다. 진정한 행복은 세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뜻에는 슬퍼하는 사람의 행복은 첫쩨 행복과 세째 행복과 나란히 서 있다. 성서에서 슬퍼하는 사람이란 뜻은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 때문에 고통받으며 우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렇게 조국의 불행을 슬퍼하는 사람은 곧 메시아의 구원을 체험하며 위로를 받을 것이다.

 

3. 온유한 사람이다 - 온유한 사람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콧대를 높이는 도도한 사람들이 아니다. 어떠한 사람이 온유한가에 대해서는 마태오복음서 5장 39-41절에 구체적인 예로 제시되어 있다.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 땅은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복구된 메시아 왕국의 땅이다.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다. - 마태오복음서에서 옳은 일은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한다. 파리사이파 유다인들은 자기네 규준에 맞추어 해석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옳은 일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율법 규준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 마태 5장20절 ) 그것은 이기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이다. "옳은 일"의 개념은 하느님이 원수들을 쳐 이기는 구약성서으 사상을 반영한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 자비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 강조되어 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교훈을 받는다 ( 마태 18장 23-35절 ) 마태오복음서에서 강조되는 자비는 온정을 베푸는 일과 용서하는 일이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 구약성서에서 유다인들의 깨끗함의 개념을 통하여 깨끗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의식적인 깨끗함이었다. 이렇게 깨끗함에 대해 파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와 잦은 논쟁을 벌였다. 무엇이 깨끗한 마음인가는 마태오복음서 15장 10-20절에 설명되어 있다. 특히 마음속을 드러내는 말에서 마음의 깨끗함과 더러움이 나타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보상은 하느님을 뵙는 일이다.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 마태 18장 10절 ) 구약성서에서 왕궁의 정신들의 특권은 늘 왕을 뵙는 것이다.

 

7.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 번영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뜻이 아니고, 화목으 도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화목을 도모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의무 중의 하나이다 ( 마태 5장 23-26절 )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인들의 특권이었다. 이제는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8.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다. - 이 행복은 이어지는 5장 11-12절에 설명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옳은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았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올바로 살기를 외치다가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니 기뻐하라고 격려하신다. 이 대목은 초기 교회가  세속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을 반영한다.

 

위와 같이 주님의 행복론을 진복팔단이라고 하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9단으로 꼽기도한다. 하지만 8단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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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은 하느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탁을 표명하는 신뢰 시편이다. 전반적으로 깊은 신뢰가 깔려있고 안전하고 평온한 분위기다. 이 시편은 만족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고 잔잔한 분위기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원수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평화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시편은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사랑받는 시편 가운데하나로서 시편의 진주로 불린다. 23편은 두 연(1-3절; 4-6절)으로 짜여있는데, 돌보는 목자로서의 주님(1-4절)과 손님을 융숭히 대접하는 인자한 주인으로서의 주님(5-6절)으로도 나눌 수 있다. 시편의 외적 형식을 살펴보면, 1절과 6절에서 '주님'이 수미상관을 이룬다 곧 이 시편은 목자이신 "주님(1절)으로 시작하여 주인이신 "주님(6절)으로 끝남으로써 주님은 시인이 의지할수 있는 모든 것이 되신다 이 시편의 4절에 위험한 상황(어둠의 골짜기, 재앙)이 있음에도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5절은 원수들 앞에서도 상을 차려주시는 상황을 묘사한다. 따라서 신뢰의 측면에서 볼 때, 목자의 표상과 주인의 표상이 주님 안에서 잘 연결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인칭에 따라서1-3절(3인칭), 4-5절(2인칭), 6절(3인칭)
로 나누기도 한다. 23편의 배경과 관련하여 6절을 고려해 보면 이 시편의 시인은 임금이며,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로 보아 대관식을 치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편 23편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또한 모든 시편 가운데 시인과 하느님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 시인은 "어둠의 골짜기"와 "재앙"(4절), "원수들"(5절)이 쫓아오는위험한 상황인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시는 주님께 깊은 신뢰를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연과 매일의 활동, 곧 '풀밭(1절), '막대와 지팡이'(4절), '상'(5절), 그리고'성전'(6절) 같은 표상들 안에 투사하여 일상의 모든 삶 안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둔다. 특히 이 시편은 상징들을 통한 단순함과 풍요로움을 조화시켜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데서 오는 최상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시편을 노래하는 독자는 시인처럼 양이 되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위협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고 확신을 가지는 시인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깉은 의미를 준다. 신앙생활은 아무런 위험이나 도전이나 어려움이나 아품없이 사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아쉬움이 많은 인생이지만 이끌어 주고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고 한평생 그분께 의지하여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친히 목자와 주인이 되어 주시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호의와 자애로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고 말씀하셨다. 목자를 신뢰하는 양의 모습은 주님을 따르는우리에게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쳐 준다.
시인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하면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을 드러낸다. 구약성경에서 목자의 표상은 언제나 집단적으로 사용되며 개인적인 관계에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목자 또는 그분 백성의 목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인은 '나의 목'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고백하고 있다. 목자의 사상에는 두 가지 체험 영역이 있다. 먼저,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유목민 생활을 했으며 정착 후에도 양 떼를 치며 살았다. 또한 주님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역사적 체험이 있다. 목자의 주요 임무는 양에게 먹이를 주는 것뿐아니라 양을 보호하는 일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
라고 말씀하셨다. 카시오도루스는"전체 시편을 통하여 이 시인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가장 충실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첫 인간의 옛 시대를 버렸다. 그는 주님의 관대함을 통하여 죄의 사막에서 목장과 부활의 물가로 인도되었음을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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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편은 "언제까지"라는 절망적인 물음으로 시작하여 기쁨과 확신에 찬 찬양의 말로 끝맺는다. 시인의 불평은 하느님º자신º원수의 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신학적 측면 곧 하느님과의 관계(2절)에서, 또한 사회적 측면 곧 이웃과의 관계(3절)에서 이해한다. 그에게 건강과 행복은 하느님이 함께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시인은 고통 가운데 하느님의 정의에 대하여 탄원하고 있다.(2-3절) 그런데 고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 시편을 기도로 바치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의 상황에 맞춰 기도를 바칠수 있도록 해준다. 이 시편은 마지막 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어 구원의 기쁨을 노래한다. 그의 구원은 주님의 자애에 근거하고 있다. 시인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죽음에 임박했으나 하느님의 변치 않는 자애에 의지하여 기도한 결과 구원을 노래하게 된다.
"언제까지"라는 히브리말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한 구슬픈 탄식을 나타낸다. 2-3절에서 " 언제까지"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 반복은 장기간의 고통과 시인의 곤경 상태를 강조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주님이 행동하시길 재촉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신뢰가 없어서 그렇다고하지만 오히려 그가 하느님을 믿기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다. 시인은 극도의 당혹감과 낙심을 표현하고 있다.
"언제까지··· 잊고, 얼굴을 ··· 감추시렵니까?라는 표현은 전형적으로 하느님의 부재를 말한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서 시인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으신다. 이 표현을 통해 육체적 질병보다 더 괴로운 정신적 소외감이 강조된다. 하느님은 시인을 잊으시고 시인에게서 숨어 계시어 그를 외면하는 듯하다. "잊고 계시렵니까?"는 하느님의 버리심을 표현한다. 주님은 이집트 탈출에서 계시하듯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을 잊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잊으심은 일시적일지라도 심각한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불멸의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 '얼굴을 감추시는 것'은 하느님의 분노나 심판을 가리킨다.
시인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고통과 번민에 시달린다. 항구를 떠난 선원이 사방을 헤매듯이, 그리고 빛을 빼앗긴 사람이 많은것들과 충돌하듯이, 하느님의 잊으심을 직면한 사람도 끊임없이 걱정과 근심과 슬픔에 사로잡힌다.(크릿소스토무스)
시인은 자기 영혼의 쓰라림과 마음의 번민뿐 아니라 원수가 괴롭히는 상황에서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이야기한다. "원수"는 구체적 인물이거나 시인의 고통 자체를 의인화한 것일 수 있다. 원수는 시인의 고통이 하느님의 벌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인이 고통을 겪고 원수가 의기양양해하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이 시인을 잊으신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3개의 명령법("살펴보소서", "대답하소서","비추소서")으로 하느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통해 주님이 어둠을 몰아낸다고 한다. "살펴보소서","대답하소서"라는 말은 얼굴을 다시 돌려달라는 표현이다. 자신이 주님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받을수 있도록 얼굴을 돌려달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잠'은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사용되는 은유다. 시인에게 죽음은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죽음의 실제적인 고통이다. 시인은 "제 눈을 비추소서"라고 하는데'눈의 빛'은 생명을 의미한다. 눈이 머는 것은죽음을 앞둔 생애의 온갖 힘이 다 빠져나간 상태다, 구원을 뜻한다. "눈을 비추소서"는 영적으로 마음의 소경 상태를 고쳐달라는 간구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는 여기서 마음으 눈을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눈이 죄 때문에 감기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다.
" 제 원수"와 "저의 적들"이 대구를 이룬다. 여기서 단수로 된 "원수"는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며, 복수로 된 "적들"은 시인의 일반적인 적들을 말한다. 시인이 '흔들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것이다.시인이 흔들릴 때 적들은 날뛴다."우리가 죄를 지음에 따라, 적들은 우리에게 거만하고 오만하게 군다. 그리고 우리는 죄에 짓눌린다. 이것은 실제로 영혼을 떨어뜨리고 억압하기 위한 죄의 본질이다" 시인은 죽음뿐 아니라 악인들이 날뛰는 것에서 구원되기를 기도한다.
시인은 혼란 속에서도 주님의 자애 때문에 든든히 서있다. 그는 과거에 하느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크게 체험했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주님의 구원을 미리 기뻐한다.시인은 그분의 의로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에 의존한다. '의지하다'는 든든하게 서있는 모습으로 5절의 '흔들림'과 대조를 이룬다. '의인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안에 굳건히 있을 때 그(녀)는 그것에 대해 칭찬을 요구하지 말아야한다. 자만 자체는,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동안, 그런 사람들을 제멋대로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시인은 탄식에만 머물지 않고 신뢰와 희망을 되찾는다. 그는 주님의 승리를 노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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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로의 생애와 그 연대기에 관한 최근 연구는 바울로의 친서-데살로니카 1서, 갈라디아서, 필립비서, 고린토1-2서, 로마서와 필레몬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내용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바,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혹시 바울로가 전하는 정보와 루가가 이야기하는 내용 사이에 어떤 불일치점이 있다면, 루가의 이야기는 바울로의 기록에 양보하고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 엔슬린, 녹스 J.Knox, 쉥크Schenk-의 주장과는 달리 루가가 바울로의 편지 중 어느 하나라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만약 루가가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은 적이 있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이 자주 지적하는 그러한  불일치점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어느 부분에서도  바울로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어디에도 편지를 쓴 적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13장 38~39절과 밀레도스에서 에페소의 개종자들에게 흔적을 사도행전에서 찾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은 제2 바울로 서간집, 특히 친서의 분위기를 풍기는 에페소서와도 차이점이 많다.

아울러 루가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들 중에는 귀중한 정보가 많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 바울로가 다르소 출신이라는 점(21,39)

● 바울로가 아카이아에서 총독 갈리오 앞에 끌려 나온 일(18,12)- 이 사실은 "바울로 사도의 경력과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그의 일반적인 경력 사이에 하나의 연결 고리가 된다.

● 바울로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점(22,25-27)

   이런 사실에 대해 바울로가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루가는 이를 전한다. 바울로의 생애와 경력을 재구성하는 데 루    가가 기여한 바가 실로 크다.

무엇보다 두 자료,  곧 바울로 친서와 사도행전은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캠벨이 사도행전과 바울로 친서의 상호 관계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나는 그의 견해를 약간 손질해서 소개한 적이 있다.(According to Paul, 36-41) 바울로의 편지에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겪은 일에서부터 로마로 가는 (계획된) 여정까지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도행전에서 루가가 전하는 바울로으 행적과 병행을 이룬다.

바울로가 자신의 경력과 활동에 관한 개인적인 사항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주요 구절들은 사도행전과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 - 조셉A, 피츠마이어 사도행전 주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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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1-19장)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예레 1,1-6,30)

하느님께서는 자신과 이방신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2,13)

예레미야는 사무엘처럼 소년이었을 때 예언자로 불림받습니다(1,6). 그가 모세처럼 부르심을 회피하려 하자, 하느님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뽑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는’,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새것을 심는 큰일입니다.

예레미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는 간음한 짓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 오너라”(3,22)고 애타게 부르시며 회개를 호소하십니다. 마음에 수술을 받고 땅을 새로 갈아 엎고 씨를 심으라고 촉구하십니다(4,3).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적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으리라고 일러주십니다. 회개인가, 심판의 재앙을 받을 것인가 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일깨워주신답니다.

완고한 백성과 계약의 파기(예레 7,1-12,17)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7,23;11,4)

다시금 예레미야는 성전을 믿고 안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헛된 희망을 고발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활태도를 고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 번제와 친교제 같은 제사보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7,23)입니다. “나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9,23).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자 하나 없고 하느님이 세운 법을 아는 자 역시 하나도 없다고 고발합니다(8,6-7).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내려준 법을 저버리고 내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그대로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9,12) 재앙을 당하리라고 다시금 선고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말로는 하느님과 가까운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떠나가는 것들”(12,2)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밤낮으로 울고 싶어하지만(8,23),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은 불길한 예언을 한다하여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예언자의 삶은 하나의 상징(예레 13,1-19,15)

예레미야가 보여준 잠방이와 오지그릇의 상징은 무엇을 뜻합니까?(13,1-11;19,1-11)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계속 고발합니다. 그 결과로 닥칠 대기근과 무서운 전쟁도 예언합니다. 잠방이를 묻고 오지그릇을 깨며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런 예언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주님 때문에 수모를 받고” 끝없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예언자가 의지한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저는 주님 한 분만을 기립니다”(17,14).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15,20)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바로 하느님, 그분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예레 20-35장)

유다의 왕과 예언자의 운명(예레 20,1-24,10)

하느님이 세워주시는 참목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립니까?(23,6))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심판을 촉구하는 예레미야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당시의 사제와 예언자들은 모두 유다에 별탈이 없으리라고 선포했으며, 백성들은 이들의 말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혹세무민하는 거짓 예언자로 몰아 때리고 가둡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에게 “웃음거리, 놀림감, 사면초가”가 된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하느님께 애소합니다. 하지만 그의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그는 손을 들고 맙니다”(20,7-10).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 그가 예언자입니다.

요시아 왕 이후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와 함께 거짓 예언자 모두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백성의 목자인 그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악행을 회개하지 않는 탓입니다. 아울러 그들을 대신하여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메시아가 오리라는 희망의 복음도 선포됩니다.

참예언자 예레미야(예레 25,1-29,32)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전하다 살해당한 예언자는 누구입니까?(26,20)

하느님께서는 유다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칠십 년이라는 처벌기한도 밝히셔서, 당신의 구원계획이 계속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지도자나 백성들은 여전히 마이동풍격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십삼 년을 하루같이 전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25,3). 야훼 하느님은 “내 말을 따라 살아라, 내가 세워준 법대로 살아라,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26,4) 재앙을 내리겠다고 거듭거듭 일러주었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재앙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의 회개만을 기뻐하시고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유다는 회복되리라(예레 30,1-35,19)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새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30,22; 31,1.33 ; 32,18)

예레미야 30-33장은 흔히 ‘위로의 책’ 또는 ‘구원신탁’이라 불립니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유다의 죄를 법대로 벌하시지만, 그 고난의 때를 겪은 다음에는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누구 하나 기억해주는 이 없어도 하느님은 잊으시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새 계약을 맺어 주시리라고 밝히십니다. 우리 인간들이나 하느님을 잊어 버리지,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심을 이사야와 함께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나는 한번도 잊은 일이 없었다”(31,20).

근위대 울 안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가 땅을 사서 옹기그릇에 넣어 봉인한 것도 하느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키야와 그 신하들은 위기가 닥치자 하느님의 율법대로 노예를 다 풀어주었다가, 위기가 사라지자 다시 잡아들여 종으로 삼는 죄를 범합니다. 몸에 밴 그릇된 생활양식을 뜯어 고쳐 바로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예레 36-52장)

마침내 성벽은 뚫리고(예레 36,1-45,5)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에디오피아 사람은 누구입니까?(38,7-13)

유다 왕 여호야킴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다음 단식일에 성전에 가서 읽어주라고 명하십니다. “내가 온갖 재앙을 내리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 가문이 그 못된 생활태도를 고칠지 아느냐?”(36,3)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씀을 다 듣고 나서도 겁을 내지 않았고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36,24). 오히려 예레미야와 서기 바룩을 잡아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렇지만 여호야킴의 아들 여고니야(여호야긴)는 즉위한 지 몇 달이 안돼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여호아하즈의 동생인 시드키야가 새 왕으로 앉혀졌습니다. 시드키야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바빌론에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 예레미야는 민족배반자로 몰려 구덩이에 갇혀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목숨만 구한 채 갇혀 지내게 됩니다.

마침내 시드키야 11년 4월 (기원전 587년 7월)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유다는 멸망당합니다. 주님께서 이십 여 년 이상 타일러주신 말씀을 듣지 않은 채 파멸의 길을 간 것입니다. 민족의 비극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바빌론이 세운 지도자 게달리야가 암살당한 뒤, 요하난 일파에 끌려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하느님은 만국의 운명을 결정하시니

(예레 46,1-51,64)

하느님께서는 어떤 자격으로 만백성의 운명을 결정하십니까?(46,18; 51,57-58)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변 민족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일러주십니다 먼저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게 형편없이 당할 터인데, 이는 바빌로니아가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야곱의 후손들은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되리라고 희망을 던져주십니다. 이어 불레셋족, 모압,암몬, 에돔, 다마스커스, 아랍 부족들, 엘람 등 주변 민족들의 몰락을 예언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최강대국 바빌론 역시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리라고 밝히십니다. 한 때 바빌론은 “야훼의 손에 들린 금술잔, 무기, 망치”(51,7.20)로 쓰였으나, 이제 “벌을 면할 길 없는 바빌론의 죄가 하늘에 닿았고 구름에 미쳤기”(51,9)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뭇 민족의 왕이십니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 할지라도 그분의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멸망은 국가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지켜 약한 이(나라)를 얼마나 돌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예레 52,1-34)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대인은 모두 몇 명입니까?(52,28-30)

부록으로 덧붙인 이 마지막 대목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왕과 사제와 기술자 등 지도층은 바빌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이집트 등 주변 각 나라로 흩어져 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흩어짐(디아스포라)이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 바빌론 유배는 유대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자 하느님께 돌아온 위대한 각성의 시기였습니다. 끝모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 삶을 가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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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신명기 28:6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누가복음 6:28인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더하면 복으로 시작해 복으로 끝나는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창세기 27:1-40 또한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는 리브가에게 초점을 맞추고 야곱이 어떻게 장자 축복을 받아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가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과 그의 내면의 움직임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의 옷을 걸친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어머니 리브가가 요리한 염소고기를 들고 아버지 앞에 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가문의 영적 축복을 청하려고 아버지 앞에 선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이 간절히 받고 싶어 했던 축복입니다. 에서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채 늘 갈급했던 세계입니다. 야곱이 갈급했던 대상 앞에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는 야곱이 한 말 중에서 거짓말이 아닌 유일한 말입니다. 이어진 말들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삭이 그에게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신분을 에서로 둔갑시키고, 염소고기를 사냥 고기로 둔갑시켜 축복을 청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20)라고 두 번째로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쉽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야곱은 목적 달성을 위해 십계명 중 제3계명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어긴 첫 번째 성경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이는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삭은 자기 앞에 있는 아들의 목소리가 에서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자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21)라고 말합니다. 그는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2)라고 중얼거립니다. 야곱의 매끈한 손과 목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감아 놓은 어머니의 위장술 덕으로 에서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이삭은 의심스러워서 한 번 더 묻습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24) 이렇게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질문 앞에서 야곱은 흔들리지 않고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거짓말하는 야곱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의심하는 아버지 앞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늘이 벼락을 내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느릿느릿 음식을 먹는 아버지를 보면서 야곱의 마음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에서가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나 연신 장막 입구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거의 발각당할 뻔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이삭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던 것입니다(30).

눈먼 이삭은 야곱을 에서라고 믿고 축복을 베풉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가슴 벅찬 축복을 받아냅니다. 다산과 부 그리고 성공과 권한에 대한 약속을 부여받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움켜쥔 자'라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장자의 유업을 움켜쥔 것입니다. 이 축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3대 족장 이름에 에서가 아닌 야곱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성경은 얼마나 자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지 모릅니다.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야곱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마 1:2)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야곱에게 준 축복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입장에선 야곱이 아니라 맏아들 에서를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사냥꾼을 축복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은 농부를 향한 축복입니다. 에서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천막에 머무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부지불식간에 야곱을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들려 주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권한을 빼앗았다는 죄의식 속에서 2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복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받아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릇된 방법을 취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닙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문제 있는 가정, 분열된 가정, 달리 말해 비신앙적인 가정에도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건강하고 조화를 이룬 가정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싸웠고, 이삭과 리브가는 편애하는 자식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입니다.

속임수는 야곱 집안을 늘 따라다니던 죄였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어떻게 남을 속이는지 보고 자랐습니다. 야곱이 청년으로 성장할 즈음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가족 모두가 블레셋 지방으로 이주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야곱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리켜 자기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창 26:1-11). 알고 보면 이삭의 뻔뻔한 행위는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갔을 때 아내인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사라에게도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해달라고 강요하였습니다(12:1-10). 그런 잘못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똑같은 잘못을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 반복했습니다.

야곱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딸 라헬에 대한 조카 야곱의 사랑을 이용하여 14년 동안이나 노동 착취를 했습니다. 더구나 조카인 야곱에게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상 결혼 당일에는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냈습니다(창 29:21-28).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리브가가 남편을 속이는 행위는 야곱의 집안에 계속 따라다니던 죄의 모습입니다. 그 죄악은 야곱의 자식들에게도 전달됩니다. 야곱의 아들 열 명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은 뒤 짐승이 동생을 잡아먹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37:25-35).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동생이 강간당했을 때,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와 세겜 왕자의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움직이지 못하자 그 틈을 이용해 칼을 들고 달려가 모조리 찔러 죽였습니다(34:1-29).

이런 집안에서 유독 정직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성경 본문 어디에도 에서가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축복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축복은 현세적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축복은 현세적 축복과는 거리가 먼 영적 축복이었습니다. 이 점은 에서와 야곱의 인생을 비교해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물질적으로 비참하게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야곱보다 더 많은 세상을 얻었습니다. 400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휘하에 있었고, 에돔이라는 부족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받아냈지만 고통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축복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보수로 착취당했고, 귀향길에 만난, 하나님으로 밝혀진 남자와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평생 장애를 지녀야 했으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귀향길에 잃고 그 시신을 길목에 묻어야 했습니다. 또 난폭하고 무분별한 자식들로 인해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남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바람에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복수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장남 르우벤이 그의 첩이었던 실바를 건드리는 불륜을 저질렀는가 하면, 10명의 아들들이 작당을 해서 그의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년기에는 혹독한 흉년으로 인해 어린 손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으며, 또 다시 정든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바로에게 그가 하던 말 그대로 모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축복의 면류관을 받았지만 그것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 것은 그가 받은 축복이 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개인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야곱이 받은 복은 남을 위한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업의 올바른 도구가 되기 위해 야곱은 일련의 시험들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사 55:13). 우리 인생에 놓인 갖가지 상처와 아픔 그리고 장애물들이 바뀌어 풍성한 열매가 된다는 신비한 약속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일 것입니다. '고난이 축복', '고난 받는 것이 은혜'라는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일 것입니다.

거짓으로 점철된 야곱과 그의 가족의 모습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하찮게 보시지 않고, 깎고 가다듬어 세상을 위한 축복의 도구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 인생에 닥친 고난을 통해 드러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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