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떤 일을 근본적으로 구명하는 사람이다. 그는 근원에서 출발한다. 이는 그가 뿌리, 곧 복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권고하는 영적 독서와 진지한 성경 고찰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과 연설에서 드러나듯이, 그에게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한 권의 책 혹은 사복음서를 뜻하지 않는다. '복음'은 원래 문서나 책이 아니라 소식, 더 자세히는 기쁜 소식과 해방하는 소식을 전한다는 뜻한다. 그 소식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며,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하고 또 그에게 결단을 내리라고 호소한다. 구약성경에서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곧 해방되리라는 소식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식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분의 죽음과 부활, 설령을 통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고 현존하시는, 높이 들어 오려지신 주님, 그분께서 맨 마지막에 올 것이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고 또 선사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소식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요 관심사는 교회 안에서 생생하게 선포되고 우리가 믿고 찬미하며 삶 속에서 실천하는 하느님의 복음이다. 그에게 복음은 다름이 아니라 기쁨의 복음이다. 이 기쁨은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존재 안에서 모두이신 하느님만이 선사하실 수 있는 충만한 삶을 의미한다. 교황 권고'복음의 기쁨' 첫 장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드러난다. 복음의 기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불의의 극복이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그다음 장에 언급된다. 그는 더 깊은 곳에 손을 댄다. 그는 기쁨과 열정이 없는 상태, 자신에게만 갇혀 있는 인간과 그의 비뚤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내적 공허와 외로움을 문제로 삼는다. 자기 자신에게만 향해 있는 비뚤어진 마음은 아우구스티누스뿐 아니라 마르틴 루터 역시 알고 있던 모티브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언급한 자기중심적 태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더 정확하게, 기쁨과 열정이 없는 상태는 초세기 사막 교부들부터 토마스 우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근본 죄이자 근본적 유혹인 나태에 연원한다. 나태는 아래로 잡아끄는 힘, 둔감함, 영적인 일에 싫증을 내는 태도로서 현세적 슬픔을 야기하는 마음 상태다.
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복음서는 모든 회의 때마다 공의회 교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였다. 이는 복음이 의장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공의회는 선포되고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을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새로이 되돌려 놓았다. 바오로 6세는 교황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화야말로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이라고 했으며, 교회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많은 강론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계획을 전개시켰다. 이 강론들은 그의 선교 회칙인'교회의 선교 사명'에 집약되어 있다. 베네딕도 16세는 그의 교서'믿음의 문'에서 그리고 2012년에 열린 주교시노드에서 이 관심사를 채택했다. 이 시노드가 거둔 열매는 '복음의 기쁨'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복음화는 다름 아닌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직에서 교회의 핵심적 사목 계획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 을 근본 핵심이라고 부른다. 이 통찰로부터 그는 선포를 위한 실제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다. 복음을 선포할 때 교리를 부수적인 측면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들을 오직 본질적 맥락에서 바라볼 때만 그 근원적 아름다움과 온전한 매력이 새롭게 빛날 것이다. 그럴 때만 복음으 향기가 새롭게 퍼져 나갈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과 도덕의 혁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도덕을 복음에서부터 해석하려 한다. 그는 이를 복음의 선포성에 상응하여 추상적이고 교훈적인 언어로가 아니라 단순한 언어, 그렇다고 단순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언어, 소통과 대화를 중시하는 언어로 해석한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그들과 동행하는 언어다. 이로써 그는 교리 가운데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이 늘 새롭고 또 새롭게하는 원천이라는 사실 그리고 결코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진리임을 보여 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에게 믿음의 아름다움을 확신시키고 그들이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삶을 살라고 용기를 북동아 주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성과 신학의 뿌리-

반응형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이해2  (4) 2022.04.18
성경의 이해 1  (3) 2022.04.06
성서 '묵시록'  (0) 2022.02.10
성경 '여덟 가지 행복'  (0) 2022.02.10
시편 23편  (1) 2022.02.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