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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로의 생애와 그 연대기에 관한 최근 연구는 바울로의 친서-데살로니카 1서, 갈라디아서, 필립비서, 고린토1-2서, 로마서와 필레몬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내용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바,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혹시 바울로가 전하는 정보와 루가가 이야기하는 내용 사이에 어떤 불일치점이 있다면, 루가의 이야기는 바울로의 기록에 양보하고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 엔슬린, 녹스 J.Knox, 쉥크Schenk-의 주장과는 달리 루가가 바울로의 편지 중 어느 하나라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만약 루가가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은 적이 있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이 자주 지적하는 그러한  불일치점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어느 부분에서도  바울로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어디에도 편지를 쓴 적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13장 38~39절과 밀레도스에서 에페소의 개종자들에게 흔적을 사도행전에서 찾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은 제2 바울로 서간집, 특히 친서의 분위기를 풍기는 에페소서와도 차이점이 많다.

아울러 루가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들 중에는 귀중한 정보가 많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 바울로가 다르소 출신이라는 점(21,39)

● 바울로가 아카이아에서 총독 갈리오 앞에 끌려 나온 일(18,12)- 이 사실은 "바울로 사도의 경력과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그의 일반적인 경력 사이에 하나의 연결 고리가 된다.

● 바울로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점(22,25-27)

   이런 사실에 대해 바울로가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루가는 이를 전한다. 바울로의 생애와 경력을 재구성하는 데 루    가가 기여한 바가 실로 크다.

무엇보다 두 자료,  곧 바울로 친서와 사도행전은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캠벨이 사도행전과 바울로 친서의 상호 관계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나는 그의 견해를 약간 손질해서 소개한 적이 있다.(According to Paul, 36-41) 바울로의 편지에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겪은 일에서부터 로마로 가는 (계획된) 여정까지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도행전에서 루가가 전하는 바울로으 행적과 병행을 이룬다.

바울로가 자신의 경력과 활동에 관한 개인적인 사항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주요 구절들은 사도행전과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 - 조셉A, 피츠마이어 사도행전 주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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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배운 똑똑한 관리자

나이서(Neisser)는 IQ검사와 교실의 학문지능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보다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상생활의 문제들과 구분했다. 이러한 구분은 현대 심리학에서는 최초의 시도였다. 나이서는 IQ검사와 교실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 정확히 정의할수 있다.
- 다른 사람들이 제기한다.
- 문제해결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수 있다.
- 정확한 답이 하나다.
-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해결할수 있다.
- 일상생활의 경험과 관련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직업생활을 포함한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정확히 정의할수 없다.
-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문제를 해결한다.
- 문제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찾기 어렵다.
- 당사장의 역량에 따라 해법이 달라진다.
- 다양한 문제해결 방법이 있다.
- 일상생활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책에서 배운 똑똑한 사람들은 업무를 수행할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학문지능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들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논리적 경영방식이나 기술적 경영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상황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모든 문제에 공통된 방법을 적용하는 것과 같다. 논리적 경영의 고전인 케프너(Kepner)와 트리고(Tregoe)의 논문에는 경영문제를 해결하는 다섯가지 핵심원칙이 나와 있다.

1. 실제수행과 예상수행을 비교하여 문제를 밝힌다.
유능한 관리자들은 예상수행과 실제수행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예상수행과 실제수행의 현저한 차이를 문제로 정의한 다.

 

2. 예상수행에서 벗어나면 문제로 정의한다.
예상수행과 실제수행의 차이를 분석하여 문제를 정의한다. 예컨대, 텍사스 공장의 청바지 불량률이 평균 5%인데 15% 까지 올라간다면, 문제를 '텍사스공장의 청바지의 불량률이 세 배로 증가했다.' 라고 정의한다.

 

3.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먼저 문제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설명한다.
다음 네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문제를 정확하게 밝힌다.
- 무엇이 문제인가?
- 어디서 발생했는가?
- 언제 발생했는가?
-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가?
잠재적인 문제까지도 포함해야 문제의 범위를 명확히 정할 수 있다.

 

4. 문제의 원인을 문제가 발견된 상황과 발견될수 있는 상황을 비교해 밝힌다.
문제가 모든 요소에서 한꺼번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문제들은 공장, 교대근무, 생산, 시간 등 각각의 요소 에서 발생한다. 문제에 내재된 원인은 문제가 발견된 상황과 문제가 발견될수 있는 유사 상황을 비교하여 밝힌다.
예컨대, 야간근무 직원들의 업무특성, 근무시간, 생산량 등 여러 사항들을 먼저 비교한다.

 

5. 문제는 뜻하지 않은 일을 만든 어떤 변화이다.
문제가 최근에 발생했다고 추측한다면, 문제의 원인은 어떤 부분에 일어난 변화일수 있다. 최근에 품질관리에 문제가 생겼다면, 문제의 원인은 최근에 품질관리업무를 맡은 신입사원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 신입사원은 교육을 제대로 받 지 못했거나 부주의하게 업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캐프너와 트리고, 프런켓(Plunkket)과헤일(hale)이 경영문제 해결을 위해 노리적 경영방법으로 제시한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이 기법은 내용이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수 있으며 모든 문제에 공통적으로 적용할수 잇다. 또 개인이 신입사원부터 단계를 밟아 총괄관리자가 되기까지 언제라도 이 기법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이 기법은 직원관리에 유연한 총괄관리자 중심의 조직운영체제도 제시한다. 또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관리자들은 이 기법을 통해 편향을 최소화하고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는 실수를 줄일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자신들이 밝힌 문제에 대한 확증을 제시할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뚜렷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경영문제 해결에 관한 지침서에서도 이 기법이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이처럼 기업들이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이 기법이 관리자들이 실제로 활용하는 방법들보다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퍼져있고, 이 기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를 잘 해결하는 관리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민츠버그에는 관리자들이 계획한 대로 일을 하지 못하거나 즉흥적으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관리자들은 대부분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을 활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문제를 정의한 뒤 단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대체로 문제를 더듭더듭 해결한다.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궁극적인 해결책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젠버그(Isenbeg)도 최고경영자들의 문제해결방법을 연구하여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이들 역시 문제를 정의하고 가능한 원인을 찾은뒤 조치를 취하는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우선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항부터 처리하면서 많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 하였다. 이들의 문제해결방식은 예방조치를 취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일이 거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은 유능한 관리자들이 그다지 많이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도, 문제해결 영역에 관한 내용지식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 때문에 문제해결원칙 전반에 걸쳐 회의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왔다. 이에 대해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을 옹호하는 측면에서는 관리자들이 사전지식이나 경험이 없어도 이 기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는 점을 최대 장점으로 꼽았다. 특히 케프너와 트리고는 관리자들이 특별한 노하우나 상세한 기술적 정보 없이도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얻는 철저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내용지식은 중요하다. 맥락과 연관된 지식이 문제를 해결할 때 얼마나 중요한지는 마지막 순서에서 살펴보겠다.
또 하나 경영문제에 합리적 의사결정기법을 적용할때 나타날수 있는 문제점은 합리적 사고를 상당한 정도로 제한하는 편향과 한계이다. 호가스는 정보획득, 정보처리, 반응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유형의 편향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이편향들은 경영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나타난다.
-획득편향
-정보처리현향
-응답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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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1-19장)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예레 1,1-6,30)

하느님께서는 자신과 이방신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2,13)

예레미야는 사무엘처럼 소년이었을 때 예언자로 불림받습니다(1,6). 그가 모세처럼 부르심을 회피하려 하자, 하느님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뽑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는’,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새것을 심는 큰일입니다.

예레미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는 간음한 짓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 오너라”(3,22)고 애타게 부르시며 회개를 호소하십니다. 마음에 수술을 받고 땅을 새로 갈아 엎고 씨를 심으라고 촉구하십니다(4,3).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적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으리라고 일러주십니다. 회개인가, 심판의 재앙을 받을 것인가 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일깨워주신답니다.

완고한 백성과 계약의 파기(예레 7,1-12,17)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7,23;11,4)

다시금 예레미야는 성전을 믿고 안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헛된 희망을 고발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활태도를 고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 번제와 친교제 같은 제사보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7,23)입니다. “나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9,23).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자 하나 없고 하느님이 세운 법을 아는 자 역시 하나도 없다고 고발합니다(8,6-7).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내려준 법을 저버리고 내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그대로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9,12) 재앙을 당하리라고 다시금 선고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말로는 하느님과 가까운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떠나가는 것들”(12,2)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밤낮으로 울고 싶어하지만(8,23),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은 불길한 예언을 한다하여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예언자의 삶은 하나의 상징(예레 13,1-19,15)

예레미야가 보여준 잠방이와 오지그릇의 상징은 무엇을 뜻합니까?(13,1-11;19,1-11)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계속 고발합니다. 그 결과로 닥칠 대기근과 무서운 전쟁도 예언합니다. 잠방이를 묻고 오지그릇을 깨며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런 예언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주님 때문에 수모를 받고” 끝없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예언자가 의지한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저는 주님 한 분만을 기립니다”(17,14).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15,20)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바로 하느님, 그분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예레 20-35장)

유다의 왕과 예언자의 운명(예레 20,1-24,10)

하느님이 세워주시는 참목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립니까?(23,6))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심판을 촉구하는 예레미야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당시의 사제와 예언자들은 모두 유다에 별탈이 없으리라고 선포했으며, 백성들은 이들의 말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혹세무민하는 거짓 예언자로 몰아 때리고 가둡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에게 “웃음거리, 놀림감, 사면초가”가 된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하느님께 애소합니다. 하지만 그의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그는 손을 들고 맙니다”(20,7-10).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 그가 예언자입니다.

요시아 왕 이후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와 함께 거짓 예언자 모두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백성의 목자인 그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악행을 회개하지 않는 탓입니다. 아울러 그들을 대신하여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메시아가 오리라는 희망의 복음도 선포됩니다.

참예언자 예레미야(예레 25,1-29,32)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전하다 살해당한 예언자는 누구입니까?(26,20)

하느님께서는 유다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칠십 년이라는 처벌기한도 밝히셔서, 당신의 구원계획이 계속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지도자나 백성들은 여전히 마이동풍격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십삼 년을 하루같이 전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25,3). 야훼 하느님은 “내 말을 따라 살아라, 내가 세워준 법대로 살아라,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26,4) 재앙을 내리겠다고 거듭거듭 일러주었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재앙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의 회개만을 기뻐하시고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유다는 회복되리라(예레 30,1-35,19)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새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30,22; 31,1.33 ; 32,18)

예레미야 30-33장은 흔히 ‘위로의 책’ 또는 ‘구원신탁’이라 불립니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유다의 죄를 법대로 벌하시지만, 그 고난의 때를 겪은 다음에는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누구 하나 기억해주는 이 없어도 하느님은 잊으시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새 계약을 맺어 주시리라고 밝히십니다. 우리 인간들이나 하느님을 잊어 버리지,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심을 이사야와 함께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나는 한번도 잊은 일이 없었다”(31,20).

근위대 울 안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가 땅을 사서 옹기그릇에 넣어 봉인한 것도 하느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키야와 그 신하들은 위기가 닥치자 하느님의 율법대로 노예를 다 풀어주었다가, 위기가 사라지자 다시 잡아들여 종으로 삼는 죄를 범합니다. 몸에 밴 그릇된 생활양식을 뜯어 고쳐 바로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예레 36-52장)

마침내 성벽은 뚫리고(예레 36,1-45,5)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에디오피아 사람은 누구입니까?(38,7-13)

유다 왕 여호야킴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다음 단식일에 성전에 가서 읽어주라고 명하십니다. “내가 온갖 재앙을 내리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 가문이 그 못된 생활태도를 고칠지 아느냐?”(36,3)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씀을 다 듣고 나서도 겁을 내지 않았고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36,24). 오히려 예레미야와 서기 바룩을 잡아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렇지만 여호야킴의 아들 여고니야(여호야긴)는 즉위한 지 몇 달이 안돼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여호아하즈의 동생인 시드키야가 새 왕으로 앉혀졌습니다. 시드키야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바빌론에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 예레미야는 민족배반자로 몰려 구덩이에 갇혀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목숨만 구한 채 갇혀 지내게 됩니다.

마침내 시드키야 11년 4월 (기원전 587년 7월)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유다는 멸망당합니다. 주님께서 이십 여 년 이상 타일러주신 말씀을 듣지 않은 채 파멸의 길을 간 것입니다. 민족의 비극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바빌론이 세운 지도자 게달리야가 암살당한 뒤, 요하난 일파에 끌려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하느님은 만국의 운명을 결정하시니

(예레 46,1-51,64)

하느님께서는 어떤 자격으로 만백성의 운명을 결정하십니까?(46,18; 51,57-58)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변 민족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일러주십니다 먼저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게 형편없이 당할 터인데, 이는 바빌로니아가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야곱의 후손들은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되리라고 희망을 던져주십니다. 이어 불레셋족, 모압,암몬, 에돔, 다마스커스, 아랍 부족들, 엘람 등 주변 민족들의 몰락을 예언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최강대국 바빌론 역시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리라고 밝히십니다. 한 때 바빌론은 “야훼의 손에 들린 금술잔, 무기, 망치”(51,7.20)로 쓰였으나, 이제 “벌을 면할 길 없는 바빌론의 죄가 하늘에 닿았고 구름에 미쳤기”(51,9)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뭇 민족의 왕이십니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 할지라도 그분의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멸망은 국가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지켜 약한 이(나라)를 얼마나 돌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예레 52,1-34)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대인은 모두 몇 명입니까?(52,28-30)

부록으로 덧붙인 이 마지막 대목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왕과 사제와 기술자 등 지도층은 바빌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이집트 등 주변 각 나라로 흩어져 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흩어짐(디아스포라)이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 바빌론 유배는 유대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자 하느님께 돌아온 위대한 각성의 시기였습니다. 끝모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 삶을 가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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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신명기 28:6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누가복음 6:28인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더하면 복으로 시작해 복으로 끝나는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창세기 27:1-40 또한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는 리브가에게 초점을 맞추고 야곱이 어떻게 장자 축복을 받아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가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과 그의 내면의 움직임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의 옷을 걸친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어머니 리브가가 요리한 염소고기를 들고 아버지 앞에 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가문의 영적 축복을 청하려고 아버지 앞에 선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이 간절히 받고 싶어 했던 축복입니다. 에서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채 늘 갈급했던 세계입니다. 야곱이 갈급했던 대상 앞에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는 야곱이 한 말 중에서 거짓말이 아닌 유일한 말입니다. 이어진 말들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삭이 그에게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신분을 에서로 둔갑시키고, 염소고기를 사냥 고기로 둔갑시켜 축복을 청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20)라고 두 번째로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쉽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야곱은 목적 달성을 위해 십계명 중 제3계명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어긴 첫 번째 성경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이는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삭은 자기 앞에 있는 아들의 목소리가 에서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자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21)라고 말합니다. 그는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2)라고 중얼거립니다. 야곱의 매끈한 손과 목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감아 놓은 어머니의 위장술 덕으로 에서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이삭은 의심스러워서 한 번 더 묻습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24) 이렇게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질문 앞에서 야곱은 흔들리지 않고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거짓말하는 야곱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의심하는 아버지 앞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늘이 벼락을 내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느릿느릿 음식을 먹는 아버지를 보면서 야곱의 마음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에서가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나 연신 장막 입구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거의 발각당할 뻔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이삭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던 것입니다(30).

눈먼 이삭은 야곱을 에서라고 믿고 축복을 베풉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가슴 벅찬 축복을 받아냅니다. 다산과 부 그리고 성공과 권한에 대한 약속을 부여받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움켜쥔 자'라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장자의 유업을 움켜쥔 것입니다. 이 축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3대 족장 이름에 에서가 아닌 야곱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성경은 얼마나 자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지 모릅니다.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야곱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마 1:2)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야곱에게 준 축복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입장에선 야곱이 아니라 맏아들 에서를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사냥꾼을 축복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은 농부를 향한 축복입니다. 에서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천막에 머무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부지불식간에 야곱을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들려 주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권한을 빼앗았다는 죄의식 속에서 2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복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받아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릇된 방법을 취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닙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문제 있는 가정, 분열된 가정, 달리 말해 비신앙적인 가정에도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건강하고 조화를 이룬 가정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싸웠고, 이삭과 리브가는 편애하는 자식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입니다.

속임수는 야곱 집안을 늘 따라다니던 죄였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어떻게 남을 속이는지 보고 자랐습니다. 야곱이 청년으로 성장할 즈음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가족 모두가 블레셋 지방으로 이주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야곱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리켜 자기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창 26:1-11). 알고 보면 이삭의 뻔뻔한 행위는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갔을 때 아내인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사라에게도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해달라고 강요하였습니다(12:1-10). 그런 잘못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똑같은 잘못을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 반복했습니다.

야곱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딸 라헬에 대한 조카 야곱의 사랑을 이용하여 14년 동안이나 노동 착취를 했습니다. 더구나 조카인 야곱에게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상 결혼 당일에는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냈습니다(창 29:21-28).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리브가가 남편을 속이는 행위는 야곱의 집안에 계속 따라다니던 죄의 모습입니다. 그 죄악은 야곱의 자식들에게도 전달됩니다. 야곱의 아들 열 명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은 뒤 짐승이 동생을 잡아먹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37:25-35).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동생이 강간당했을 때,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와 세겜 왕자의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움직이지 못하자 그 틈을 이용해 칼을 들고 달려가 모조리 찔러 죽였습니다(34:1-29).

이런 집안에서 유독 정직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성경 본문 어디에도 에서가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축복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축복은 현세적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축복은 현세적 축복과는 거리가 먼 영적 축복이었습니다. 이 점은 에서와 야곱의 인생을 비교해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물질적으로 비참하게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야곱보다 더 많은 세상을 얻었습니다. 400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휘하에 있었고, 에돔이라는 부족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받아냈지만 고통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축복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보수로 착취당했고, 귀향길에 만난, 하나님으로 밝혀진 남자와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평생 장애를 지녀야 했으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귀향길에 잃고 그 시신을 길목에 묻어야 했습니다. 또 난폭하고 무분별한 자식들로 인해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남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바람에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복수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장남 르우벤이 그의 첩이었던 실바를 건드리는 불륜을 저질렀는가 하면, 10명의 아들들이 작당을 해서 그의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년기에는 혹독한 흉년으로 인해 어린 손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으며, 또 다시 정든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바로에게 그가 하던 말 그대로 모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축복의 면류관을 받았지만 그것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 것은 그가 받은 축복이 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개인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야곱이 받은 복은 남을 위한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업의 올바른 도구가 되기 위해 야곱은 일련의 시험들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사 55:13). 우리 인생에 놓인 갖가지 상처와 아픔 그리고 장애물들이 바뀌어 풍성한 열매가 된다는 신비한 약속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일 것입니다. '고난이 축복', '고난 받는 것이 은혜'라는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일 것입니다.

거짓으로 점철된 야곱과 그의 가족의 모습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하찮게 보시지 않고, 깎고 가다듬어 세상을 위한 축복의 도구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 인생에 닥친 고난을 통해 드러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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